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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갓생 산다."

<온다 칼럼> 김효진(평등평화세상 온다 회원)

뉴스99 |

 

요즘 청년 세대라면 한 번쯤 들어본 말일 것이다. ‘갓생’이란 긍정적인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쓰는 ‘갓(god)’과 삶을 뜻하는 ‘생(生)’을 합친 신조어다. 즉 ‘갓생’이란 ‘좋은 삶’ 정도가 되겠다. 이때 ‘갓생’이 내포하는 ‘좋은 삶’의 의미는 ‘부지런한 삶’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일찍 일어나거나, 장시간 공부를 하거나, 하루동안 많은 활동을 하는 등 부지런히 사는 삶을 ‘갓생’이라 한다. 대부분은 칭찬으로 쓰이곤 하는데, “너 갓생 산다”는 말이 이와 같다. 요컨대 부지런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갓생’이라는 말이 듣기 버겁다. 언젠가 오래된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간 바쁜 탓에 연락도 잘 못하고, 지친 상태로 오랜만에 만난지라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추억이야기를 해봐도 서로에게 느껴지는 거리감은 가시질 않았다. 못 본 동안 나도 친구도 많이 달라져서 이제는 서로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내가 바빠서 친구를 소홀히 대했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그래서 친구에게 바빠서 연락하지 못했다고, 피곤해서인지 지금도 잘 즐길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친구가 “그래도 넌 갓생을 살잖아”라고 말했다. 기분이 묘했다. 줄곧 칭찬으로만 써왔던 ‘갓생’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친구와 멀어지고, 휴식도 제대로 못하는 스트레스 가득한 삶을 누군가가 갓생이라 부르는 게 이상했다. 그날 이후로 한가지 의문점이 가슴에 남았다.

 

진정한 갓생이란 무엇일까? 앞서 ‘갓생’이란 ‘좋은 삶, 부지런한 삶’ 등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부지런함’을 ‘좋음’과 같은 맥락으로 취급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부지런함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지런하기만 하면 꼭 좋은 것인지, 칭찬받을 만한 것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은 처음 계약했던 것보다 몇 배 많은 업무량을 견뎌내야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사장의 갑질까지 심했다. 하지만 당장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 없었다. 결국 일하는 동안 몸이 많이 망가졌다. 업무량이 늘어난 만큼 시간이 부족해지니 밤을 새고 밥을 거르며 과제를 했다. 그동안 건강은 더 나빠졌다. 당연히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주변인들과 멀어졌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다친 시기였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이런 삶 마저도 부지런히 살았으니 ‘갓생’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스스로 병들게 내버려둔 것은 본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병든 모습을 마치 ‘갓생’에 대한 훈장인 것 마냥 칭찬하는 사회가 기괴하게 느껴진다. 아니면 혹시 더 부지런해야 했던 것일까? 내가 병든 이유는 내가 더 부지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갓생’을 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일까? 여기서 더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에 숨이 덜컥 막힐 뿐이다.

 

이제는 ‘갓생’이라는 말이 ‘누가누가 더 부지런하게 사는지 평가하는지 보겠다’는 경쟁의 척도가 된 것 같다. “너 갓생 산다”는 말에 주로 뒤따라오는 말이 있다. 바로 “너에 비해 나는 게으르다”와 같은 말이다. 부지런히 사는 상대에 비해 본인은 한 것 없이 시간을 버리고 있다며 자기비하를 하는 것이다.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며, 스스로 ‘갓생 살기’ 경쟁에서 뒤쳐졌다고 느낀다는 점이 문제다. 왜 남보다 무언가를 더 적게 했다는 이유로 패배감을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부지런함을 칭찬하는 사회보다는 진정 행복한지 물어보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사람은 각각의 색다른 삶이 있고,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그런 사람들을 한 데 모아 경쟁하도록 부추기고, 더 부지런한 사람을 칭찬하는 사회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 행복에는 인내가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더이상 끝이 보이지 않는 인내에 병드는 자신을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이제는 진정한 ‘갓생’, 즉 ‘좋은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