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9 (금)

  • 맑음서울 1.9℃
  • 맑음수원 1.6℃
기상청 제공

'유토피아'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

<온다 칼럼> 윤태경(평등평화세상 온다 운영위원)

뉴스99|

 

4차 산업혁명, ai시대를 통해 우리는 노동에서 해방된 유토피아를 맞이할 수 있을까? 많은 낙관론자는 4차 산업혁명이 유토피아를 선사할 것이라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영향을 안 받는 또는 영향을 받아도 별 상관이 없는 낙관론자들은 디스토피아가 될 이들이 겪게 될 고통은 축소하고 외면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자본이 주도하는 변화에 유토피아가 있을까?

 

기업이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가? 이번 SPC 평택 SPL 제빵공장 직원 기계 끼임 사망 사고를 보면 자본이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이익을 위한 집착이 보인다. 혼합기 안전장치 30만원도 아까워서 설치를 미루다가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망 사고가 없었다면 더 많은 노동자가 끼임 사고를 당해 손을 다쳤을 것이다. SPC는 이번 사망 사고 직후 바로 모든 기계에 안전장치를 설치했다. 언제든 설치할 수 있던 단돈 30만원짜리 안전장치를 노동자의 죽음으로 정부, 언론, 시민들의 질타 때문에 허겁지겁 설치한 것이다.

 

정부와 언론에서 바라보는 노동은 어떤가? 화물노동자들이 안전운임제라는 지속이 가능한 노동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요구하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이유를 들어 업무지시 명령을 내리고 있고, 파업을 흔들기 위해 파업의 불법성을 말하고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떼쟁이로 만들고 있다. 언론은 정부의 말을 그대로 보도하면서 건설 현장이 멈췄다고 주유소에 기름이 없다는 기사를 통해 파업의 피해만 보도하고 있다. 화물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제대로 담지 않고 있다.

 

한국은 노동 천대 사회이고, 이익 중심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자를 해고하고 이익을 높일 방법이 있다면 자본은 어떤 선택을 할까? 자본이 주도하는 변화에는 이익을 위한 효율은 있어도 사람은 없다. 변화하는 상황에 희생되는 것은 노동자이다. 노동 천대가 만연한 사회에서, 이익 앞에서 노동자가 설 자리는 없다.

 

아직은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영국 드라마인 이어즈&이어즈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난다. 이어즈&이어즈는 2019년부터 2034년 동안 영국의 평범한 라이언가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우경화된 사회, 기후위기 문제, 기술의 발전으로 소외된 인간, 국제분쟁 등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화에 큰 고비를 넘기고 희망이 올 것 같은 상황에서 20세기와 21세기를 살아온 가장 연장자인 뮤리엘 디컨이 말한다.

 

“난 모든 게 잘못되는 걸 봤다. 시작은 슈퍼마켓이었어. 계산대 여자들을 자동 계산대로 바꾼 게 시작이었지. 20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거리 시위는 했니? 항의서는 썼어? 다른 곳에서 장을 봤니? 안 했지. 씨근덕대기만 하고 참고 살았어. 실은 우리도 그 계산대를 좋아하고 원하니까. 거닐다가 장 볼 물건을 고르기만 하면 되거든. 계산대 여자와 눈 마주칠 일 없지. 이제 계산대 여자들은 다 사라졌다. 우리보다 적게 버는 그 여자들 말이야. 우리가 없애고 쫓아낸 거야. 우리가 이 지경으로 놔둔 거야.”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가? 코로나 이후로 4차산업혁명을 말하는 지금 여기저기에서 키오스크가 계산원들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키오스크는 이제 익숙한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대체된 계산원들은 지금은 다른 노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노동이 사라지고 대체된다면 일자리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저임금의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자리로 내몰릴 것이다. 더욱더 최악은 수많은 실업자가 저임금의 보호 받지 못하는 일자리라도 갖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오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제2의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할 것인가? 기계를 부순다고 시대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다. 흐름은 너무 빠르고 강력하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 흐름을 멈추고 역행할 수는 없지만, 흐름의 방향을 바꿀 수는 있다. 노동 천대 사회에서 노동 존중 사회로 이익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로 변화시킨다면,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로 변화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